본문 바로가기

살림과 영성

일상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싶다. 숨쉬고, 먹고, 자고, 싸는 이 모든 것이 신앙이고 싶다. 바닥부터 시작하려고 익산에 내려왔다. 굳이 혼자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동체는 많이 있으므로 함께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다 보니 나는 홀로되었다. 나의 역량 때문이기도, 내가 처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하는 것이 순종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해' 쓸고 닦고 치우고 정리하고 밥하고 등등 몸을 움직이는 것은 짜증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보람찬 일이다.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존재가치가 증명된다. 혹시 잘 되지 않더라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함께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다.

나 자신의 몸을 위해 쓸고 닦고 정리하고 밥하고 치우는 일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많은 청년들, 노인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이 도시에서, 소외된 지역에서 구조적 문제에 의해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 이에 비하여 나는 하고자 하면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할머니댁에 올라갈 수도 있고, 신앙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공동체 생활을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독거가구에게 독거는 선택이 아니다. 그들이 내몰린 현실이다.

그저께 이사를 했다. 이 공간에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자신만을 느낀다. 그리고 이 공간은 나에게 할당되었다. 창세기 1-2장에서 사람은 자연을 돌보고 가꾸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3장에서 창조주와 단절된 이후로 사람은 창조주뿐만 아니라 자연,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자연은 사람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 없이 혼자 나와 이 공간에만 집중하여 지내고 있으려니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 창세기 신앙이 온전히 느껴진다. 북서향으로 나있는 이 집은 단열시공이 잘 되지 않아 그저께 이사하면서 청소를 했는데도 외벽쪽과 화장실의 창문과 벽에 하루가 멀다고 검은 곰팡이가 생겨간다. 일주일 내내 이사를 준비하느라, 그리고 서울에서 쫓기듯 내려온 터라 몸과 마음이 소진된 지금 상황에서, 곰팡이라는 자연물은 마치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심리적 위협으로 내게 다가온다. 볕도 잘 들지 않고 겨울이라 계속 환기를 시킬 수도 없어 건조한 겨울인데도 벽면과 창틀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습기가 맺히는 이 집에, 이 환경에 내가 잠식당하는 것 아닐까 하루내 두려움에 떨었다. 먹고살기 위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헤치고 땀흘려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주어진 이 공간을 돌보고 다스리기 위해 해야할 일은 앞으로도 많다. 타르가 찌든 화장실 창문 닦기, 냄새나는 베란다 청소하기, 여기저기 찌든 때 제거하기 등.... 아마 나보다 털털한 사람은 그냥 '어, 더럽네' 하고 지나칠 환경일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내 눈에, 코에, 가슴에 콕 와서 박히는 걸. 이걸 더 윤나게, 향기나게, 예쁘게 만들고 싶은 걸.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은 걸. 그렇지 않으면 속상한 걸. 당장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피곤한 이 몸이 내내 서글프다. 전에는 자유롭지 않고 도시에 속한 것 같은 예민한 내 모습이 싫어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이 묵상은 사실 보잘것 없는 내 예민함의 토로일 뿐인데 이 시간이 나를, 내 영성을 가꿀 수 있을까 두렵다. 무섭다. 이 환경도,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미래도, 이제는 진짜 혼자인데 얼마마다 찾아오는 어떻게 언제 극복될는지 모르는 우울증을 겪을 기간도.

혼자 그 창조주를 독대하는 것이 두려워 반 년 가량 매번 공동체의 사랑 안으로 도망쳤는데, 외면할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계속 두려움에 떨고 있다. 혼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림  (0) 2016.05.27
일상의 영성  (1) 2016.03.16
우리는 기억해  (1) 2015.05.25
이런 힐링  (0) 2014.12.24
망하면 망하리라  (3)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