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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예수 따라 사는 것, 예수처럼 사는 것

지난 겨울 수련회 라디오 시간에 나는 학자금 대출에 자취방 월세에 생활비에 돈 버느라 안식일에 쉬지 못하는 이 시대 청년으로서의 고민을 내놓았다. 나는 패널 목사님이 1.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듯이 꾸짖거나 2. 아니면 네가 맞다, 잘 하고 있다 우쭈쭈 하실 줄 기대하고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가장 먼저 청년들이 놓인 그런 상황에 진심으로 마음아파하셨다.
그리고 원래 정답은 없지만 어쨌든 답변은 또 내가 내놓은 모든 해답들과도 다른 것이었고. 어쩌면 나에게 답이 없으니까 물어본 거긴 하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안은 공동체였다. 원칙은 나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 것. 공동체라는 안전망이 없을 때는 지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해지지만, 공동체 안에 속해서 안전한 채로 미래의 소망을 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내 안에 전혀 없던 그 대안을 덕분에 용기내어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학기에는 용기내어 일 하나를 그만두고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고. 채워주시는 그분과 실패할 것 같을 때 지켜주는 공동체덕분에.

관계가 소원한 다수의 사람들을 매일 마주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학교를 다니면 그런 사람들을 매일 몇 명씩 매주해야 한다. 인사를 할까 말까, 이 관계에 나는 힘을 쏟아야 하는가, 거절당하더라도 괜찮을만한 에너지가 지금 나에게 있을까. 며칠 전에 아는 후배가 인사를 하는데 바쁜척 못본척 지나갔다. 그럴 때는 시야가 좁은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진다. 항상 멍때리고 다니거나 뭔가에 골똘히 빠져서 지나가도 잘 모르는 사람들 말이다.
사실 얼굴 알고 이름 아는 선후배 한둘을 그렇게 모른척 한 것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그날은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신입생 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고, 의견을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열렬한 비난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을 닫았다. '얘들아, 이 학교에서 밥 몇 번 먹었다고 계속 인사하는 관계가 될 거라고 기대하진 마. 나도 그런 후배였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 너네가 적응해야 돼. 나도 그랬어'라고 나도 후배들에게 무언의 경험담을 말하며 인사를 씹어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왔는데, 그날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해왔던 게 얼마나 끔찍했던가를 문득 깨달았다. 향찌 같은 사람에게도 정말 작은 인사 하나는 중요한 것이었고, 신입생 때의 나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바꾸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렇게 적응하고 마음에 꿈틀거리는 관심을 애써 회피해왔다.
그날 예수님이 나에게 임한 방식은 날 매섭게 꾸짖는 것도, '네가 맞아'라고 정답을 맞췄다고 띄워준 것도 아니었다. 내가 인사를 못본척 한 그 후배의 마음이 되게 하셨다. 신입생 때 그 외면과 거절을 내가 어떻게 경험했는지 다시 알게 하셨다. 그 마음을 이해하도록. 그리고 내면의 상처 없는 그분의 마음을 따라 살고 싶은 소망을 주셨다. 그건 너무 어렵지만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권면이라는 이름으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언이나 교제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함께 마음아파하는 것,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 아닐까. 그런 예수님 따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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